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호야스의 파괴자 ==== [[파일:external/blog.georgetownvoice.com/jtii-ewing-reagan.jpg]] 캠브리지 린지 앤 라틴 스쿨 시절에는 마이크 자비스 감독[* 1945년 4월 11일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 출생. 노스이스턴 대학교 재학 시절 딕 듀크셔 감독 밑에서 농구를 배워 1966년 및 1968년 NCAA 칼리지 디비전(현 디비전2) 전국대회에 두 번 진출시켰다. 졸업 후 1968년 모교의 코치로 부임하여 5년을 일하다가 1973년에 하버드 대학교로 옮겨 4년 간 지냈고, 1978년부터 고향에 있는 캠브리지 린지 앤 라틴 스쿨에서 감독으로 데뷔하여 임기 7년 동안 유잉 외에 칼 홉스(전 조지 워싱턴 대학교 감독), 루밀 로빈슨 등을 발굴했다. 1985년부터 보스턴 대학교로 옮긴 후 임기 5년 동안 101승 50패라는 고승률을 자랑하며 1987-88 및 1989-90 시즌에 NCAA 전국대회 진출을 일궈냈고, 1990년 조지 워싱턴 대학교로 옮겨 임기 8년 간 잉카 다레 등을 길러내며 1993년 NCAA 전국대회 때 16강까지 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1998년 세인트 존스 대학교로 또 전근하여 임기 5년 간 메타 샌디퍼드아티스트, 펠리페 로페즈, 젠든 해밀턴, 에릭 바클리, 라버 포스텔, 오마 쿡 등을 육성하며 1999년 NCAA 전국대회 8강, 2003년 NIT 우승 등을 일궜으나 2003-04 시즌 초반부터 비 컨퍼런스 팀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사퇴 압력을 받아 2003년 12월에 경질되었고, 이후 일부 선수들의 여학생 폭행 등 코트 외적인 비행, 에이브 케이타 선수의 비리 폭로 등으로 이미지가 안 좋아지다 못해 농구부는 2004-05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권 제외, 2003년 NIT 우승 등 43승 기록 말소, 정기 조사 2년 등의 징계를 받았다. 2008년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6년 간 재직했고, 감독 외적으로 ESPN 대학농구 해설위원, 야후! 스포츠 논설위원 등도 맡았다.]에게 가르침을 받아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선수가 되어 1980년 및 1981년 <퍼레이드> 지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두 번 선정됐고, 1981년에는 미국 올해의 고교선수상과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에도 선정됐다. ESPN Sports Century 유잉편에서 한 기자의 회상에 따르면 유잉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다른 팀 선수들은 "불공평하잖아. 너넨 패트릭 유잉이 있는데..."라고 불평할 정도로 급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당연히 상대팀 팬들 입장에선 악의 축 취급이어서 유잉이 문맹이다[* 문맹률이 0에 가까운 대한민국에서야 씨알도 안먹힐 소리지만, 미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엘리트급 스포츠맨, 특히 흑인 엘리트 스포츠맨을 비하하기 위한 떡밥으로 자주 이용되는 멘트이다.]를 포함해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대형[[센터(농구)|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많은 대학들은 영입을 시도했고, 유잉은 그 중 [[워싱턴 D.C.]]의 농구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부는 당시 존 톰슨 주니어(1941~2020)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 1972~1999년까지 27년간 감독을 역임했으며, 1988 서울 올림픽 때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훗날 유잉의 전임 감독인 존 톰슨 3세는 그의 아들이다.] 존 톰슨은 프로비던스 칼리지 시절 조 멀라니 감독의 직계 제자[* 레이먼드 플린 전 보스턴 시장도 대학 시절 그의 팀메이트였다.]이자 보스턴 셀틱스에서 빌 러셀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던 센터로, 이 대학 농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선수생활 경력을 살려서 뛰어난 센터를 조련하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유잉이었다.[* [[앨런 아이버슨]]같은 가드 출신도 있지만 패트릭 유잉 이래로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같은 NBA에 족적을 남긴 정통파 센터들이 조지타운 대학교를 나왔다. 그외 현역 선수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센터 [[로이 히버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센터 [[그렉 먼로]]등이 있다.] 그런 덕분인지 존 톰슨은 유잉의 엄청난 덩치와 잠재력을 폭발시키면서 대학 무대를 평정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유잉은 굉장히 독특한 패션을 추구했는데, 반팔 셔츠를 유니폼 안에 입은 일종의 레이어드 패션이었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유잉에 대해 전미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걸출한 신입생의 합류와 맹활약에 힘입어 조지타운 대학은 1982년 March Madness에서 숱한 대학을 박살내며 결승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거기서 마주하게 된 대학은 바로 딘 스미스 산하에서의 첫 우승을 노리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타힐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는 [[제임스 워디]], [[샘 퍼킨스]]라는 막강한 프론트 코트를 갖추고 있었던 강팀이었다. 그러나 조지타운은 유잉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수비[* 참고로 이 경기에서 그는 팀내 최고인 23득점 11리바운드 4블록을 기록하면서 군계일학의 활약을 보였다. 경기 최우수선수에 선정된 제임스 워디가 28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때 조던이 위닝샷을 성공시켜 노스캐롤라이나가 역전하지 못했다면 무조건 유잉이 최우수선수로 선정됐을 것이다.]를 통해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덕분에 당시 게임은 근소한 차이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접전이 이어졌다. 17초를 남긴 상태에서 1점 차이로 조지타운의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고,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 차례가 되었다. 조지타운은 1점 리드를 지키기 위해 수비를 견고히 다지고 있었고, 특히 워디에게 모든 수비가 집중적인 디나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지미 블랙은 워디에게 패스를 투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신입생 가드 한 명이 오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어렵사리 볼을 건넸고, 그는 노마크 상태에서 가볍게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역전시키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이어지는 조지타운의 공격에서 스틸을 성공시키며 1982 NCAA 챔피언에 등극하고, 결승골을 성공시킨 신입생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 그때는 이후 이어지는 질기고 질긴 악연을 상상조차 못했겠지만... 물론 오해는 하지 말 것이 이 둘은 절친 사이이다. 실제로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조던은 패트릭 유잉을 최고의 센터로 뽑기도. ~~"올라주원? 걔는 [[스몰 포워드]]잖아"~~ ~~정작 그래놓고 최고의 스몰 포워드로는 대학 선배 제임스 워디를 뽑았다~~][* 다만 조던의 슛 이후에도 시간이 남아서 역전의 기회가 있긴 했다. 그런데 조지타운대의 포인트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공을 몰고오다 마음이 급했는지 그만 상대팀의 제임스 워디에게 패스를 하고 만다(기록상 워디의 스틸로 됐지만 영상을 보면 스틸당한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주는 수준이다). 긴급한 상황이라 파울밖에 할 수 없었고, 워디가 비록 자유투를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자유투 이후 진짜 시간이 없어져서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 첫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유잉은 고작 1학년인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또한 절치부심하며 NCAA 우승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2학년이 된 다음해에는 고작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3학년이 되자 그는 다시금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조지타운과 만나게 된 대학은 바로 "PHI SLAMA JAMA"라 불리던 휴스턴 대학이었다. 당시 휴스턴 대학은 전년도 파이널 준우승팀인데도 토너먼트 MOP를 수상한 최대의 라이벌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강팀이었다. 자메이카산 야수와 나이지리아산 괴물센터간의 대결은 전미를 흥분시켰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결승전에서 유잉은 올라주원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O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유잉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팀에 주전으로 당당히 선발되었으며, 조던 등과 함께 팀을 금메달로 이끈다. 이어지는 84-85 시즌 당시 동년배였던 올라주원과 조던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드래프트를 위해 대거 얼리 엔트리를 제출한 가운데, 유잉은 묵묵히 조지타운에서 졸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유잉이 만약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얼리 엔트리를 제출했다면, 1984 드래프트의 1순위는 유잉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대학무대에서 유잉의 가치는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센터 보강이 절실했던 포틀랜드가 30년 동안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도 없었을 듯. ~~올라주원을 놔두고 여전히 2순위로 샘 보위를 뽑았을지도~~ 진지하게 생각하면 당시 기록을 보면 포틀랜드건 시카고건 모든 팀들의 1순위는 올라주원이었기 때문에 유잉을 못 뽑은 포틀랜드는 당연히 올라주원을 뽑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래 센터를 원했었고, 센터가 아닌 가드 조던을 뽑았다고 시무룩했던 시카고가 얼씨구나 하고 보위를 뽑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잉과 그 이전에 대학 최고의 선수였던 랠프 샘슨이 막강 트윈타워를 휴스턴에서 결성하고, Phi Slamma Jamma 콤보인 올라주원과 드렉슬러가 프로에서 재회한 포틀랜드가 왕조를 이룩하고, 시카고 불스는 역대 최강의 선수를 못 뽑아 하위권 탈출에 실패하는 등 NBA 구도가 크게 뒤흔들렸을 것이다. 또한 비록 센터가 아니란 이유로 밀렸지만, 당시 올해의 대학선수상을 석권했던 조던이 4위까지 밀렸는데 안 뽑는 건 미친 짓이기 때문에(원래 4위로 뽑힌 샘 퍼킨스는 조던보다 1년 선배로 6피트9인치 포워드고 조던보다 실력이 현저히 딸린다) 당연히 댈러스 매버릭스가 조던을 뽑았을 것이다. 이때 댈러스는 사상 처음으로 5할 승률 이상을 거두고 2라운드에 진출하는 등 강팀으로 발돋음하던 시기였는데, 여기에 조던이 합류했다면 단연 우승후보로 올라갔을 확률이 높다. 즉, 80년대 중반 서부에서는 레이커스 독주에 휴스턴이 그나마 견제하는 체제였는데, 두 팀의 전력은 크게 변화없이 댈러스, 포틀랜드의 전력이 크게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랬다면 보스턴이 필라델피아, 밀워키 등의 도전에 힘겨워했던 동부처럼 혼전이 있었을 것이고 기존 역사에서처럼 레이커스가 80년대에 9번이나 당연한 듯 파이널에 올라가긴 힘들었을 것이고, 매직과 버드의 평가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고작 드래프트 한번에 NBA 판도가 흔들린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당시 이 선수들은 루키로서 혼자 힘으로 프랜차이즈를 바꿔놓는 힘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로키츠는 올라주원을 뽑기 전 29승팀에서 갑자기 48승팀이 되었으며(다만 시즌 후반에 기괴한 연패로 탱킹 의혹이 있다), 불스는 27승팀이 38승으로 올랐다. 조던은 신인으로서 올-NBA 세컨드 팀/득점 3위에 올랐으며, 올라주원은 20.6점 11.9리바운드를 올리며 올스타에 뽑혔다. 패트릭 유잉은 20점 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한마디로 이 선수들은 일반적인 루키가 아니라, 데뷔와 동시에 리그 최정상급 선수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던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85년 March Madness에서 유잉은 다시금 팀을 결승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해낸다. 빌라노바 대학과의 결승에서 조지타운은 2점차 아쉬운 석패를 거뒀지만[* 참고로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가 이길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지타운은 톱시드팀에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 중 한명이라 인정받던 유잉이 이끄는 팀이었고, 빌라노바는 별 스타플레이어도 없는 8번 시드의 그냥 그럭저럭 강한 팀이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는 무려 필드골 성공률 78.6%라는, 그야말로 단체로 신들렸다고 할만큼 말도 안되게 슛이 터져 승리를 거머쥔다. 감이 안 잡힌다면, 보통 농구에서 팀의 필드골 성공률은 5할만 넘어도 준수하고, 6할을 넘으면 단체로 삘받은 거고, 7할을 넘으면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는 엽기적인 수준이다. 참고로 2014 파이널 3차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전반에 75.8%를 기록했는데 '''전반 24분 동안 디펜딩 챔피언 히트를 상대로 21점차를 냈다'''. 이렇게까지 슛이 들어갔는데 2점차밖에 안 난건 오히려 유잉과 조지타운의 위엄인 셈.][* 당시 조지타운대는 야투 53개를 던져 29개를 넣으며 54.7%란 준수한성공률을 보였는데, 빌라노바대는 조지타운의 절반 좀 넘는 '''야투 28개를 던져 그 중 22개를 성공'''시키는 미친 효율을 보였다. 후반에는 야투 단 한개만 놓쳤을 뿐이다. 물론 유잉을 14점으로 봉쇄한 지역방어 역시 훌륭했다. 워낙 빌라노바의 슛감이 좋아서인지 조지타운은 파울로 막아보려했지만 이들은 자유투 27개 중 22개를 성공시켰다. 저 자유투 시도를 감안해도 빌라노바는 조지타운보다 훨씬 적은 공격시도를 했으며, 턴오버수도 조지타운보다 많았다(17대11). 즉 유잉의 부진을 감안해도 조지타운대가 우세했어야 정상이나, 빌라노바의 슛이 던지는 족족 적중하는 수준이라 지고 만 것이다. 조지타운대는 시즌 내내 상대팀을 평균 야투율 39%로 막아낸 좋은 수비팀이었나 저렇게까지 슛이 들어가면 이길 수가 없다. 빌라노바는 실제로 이 경기로 아직까지 역대 파이널4 사상 최소 야투시도/최고 야투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결승진출 3회, 우승1회, 주요 올해의 대학선수상 석권이란 화려한 이력을 가진 유잉은 역대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다가오는 1985 드래프트는 유잉 드래프트가 될 것이란 왁자지껄한 분위기 아래 유잉은 대학을 마치고 NBA에 입성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